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용정市으로 갔습니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1917년 태어난 윤동주 학생이 다녔던 중학교는 용정 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을 사랑하는 분들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해서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시비도 세웠습니다.
한국에 시인이 수없이 많지만,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시인으로는 아마도 윤동주 시인이 제일 앞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윤동주 시인과 북간도에서 행해졌던 독립운동에 대한 여러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은 1948년 발간되었는데 자료관에는 원본은 없이 사진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문학기행으로 윤동주의 발지취를 찾아갔던 61명의 일행은 그의 묘소를 찾으나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은 언덕길을 20여분 걸어 올라갔습니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 일반 관광객들은 잘 오지 않는 곳이라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쿄토로 유학을 갔다가 거기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됩니다.
한글로 시를 쓴 것이 죄라면 죄였을까. 일본 경찰은 그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확실하게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뚜렷한 죄도 없이 복역하며 생체실험용 주사를 수없이 맞으며 고생하다
1945년 2월16일 윤동주는 허망하게 사망하였습니다. 여섯달만 더 버티면 광복을 보았을텐데......
28살된 젊은 아들의 시신을 화장해서 고향으로 데려온 아버지와 삼촌은 그가 태어났던 명동촌 부근의 공동묘지에 눕히기로 합니다.
1945년 3월6일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집도하는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장례식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 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습니다.
묘비에 시인 윤동주라 새겼습니다.
아직 세상은 그가 시인인지 몰랐지만 가족들은 그가 시인임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 후 오랫동안 그의 묘는 수많은 묘들 사이에서 외로이 서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해방과 더불어 북간도를 떠나왔고 더러는 사망하고 , 공산국인 중국과 한국이 국교가 없는 때라
남은 가족들은 오랜 기간 묘를 찾아보러 갈 수도 없었습니다.
용정에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었지만, 중국역사만 배우는 조선족들은 윤동주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일본인 교수 한 명이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장례식 때 찍은 빛바랜 사진 하나를 들고 일본인 교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온갖 자료를 뒤져보고
너른 산등성이에 수없이 있는 무덤 중에서 사진 속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윤동주 묘비를 찾아냅니다.
유가족들은 중국와 한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이 곳으로 찾아와 봉분을 새로이 단장하고
쓰러진 묘비도 새 것으로 세웠습니다.
묵념을 하고 헌화를 했습니다. 서울서부터 가져간 조화도 있었으나 그 산에 핀 여린 들꽃 묶음이 더 아름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를 여러 편 낭송하고
몇 윤동주 매니아들이 수줍게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인생에 그의시가 얼마나 많은 떨림을 주었는지 간증(?)하였습니다.
하모니카 연주강사인 최삼순씨가 그의 묘소 앞에서 <선구자>를 연주하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풍경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그의 짧은 생애를 생각하면 그에게 바치는 우리의 사랑이 하늘나라에 있는 그에게는 무슨 위안이 될까 싶기도 합니다.
북간도 명동촌은 1899년 함경남도 종성 출신의 회령 출신의 네 가문이 이주하여 세운 마을입니다.
명동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윤동주가 15살까지 살던 명동촌의 집은 1981년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집은 1994년 복원된 것입니다.
어린 윤동주는 이 집에서 명동소학교를 다니고 어린이용 잡지 <아이생활> <어린이>를 구독하였습니다.
1932년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그의 가족들은 용정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 당시 명동촌은 초기의 집결력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기독교를 아편으로 몰아부치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인 주민들에게 생명의 위협까지 가하는 바람에
기독교인인 윤동주 가족들은 더 이상 그 정든 마을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윤동주 생가 마당에는 포플라 나무 세 그루가 미끈하게 서서 빈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집안 구조도 어느 정도 복원을 해놓아 그 당시 가옥구조를 볼수 있습니다.
추운 곳이라 북방식 난방을 하고 있어 부엌이 방과 겸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가 옆에서는 작은 부속 건물이 있었습니다. 아마 커피숍으로 잠깐 영업을 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생가에서 나오자 길 건너 언덕에 한가로이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영혼이 부디 평화롭기를...
(2010. 8. 14일 방문)
글, 사진-동화작가 임정진
참고자료 제공- 김경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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