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 선생 서세 50주기 추념식·특별전
가인 김병로 선생 서세 50주기 추념식·특별전
KTV 입력 2014.01.13. 17:51남>
오늘은 우리나라의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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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에서 사법부 주요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추념식과 특별전이 열렸는데요.
김경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사내용]
양승태 대법원장과 황찬현 감사원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 등 사법부의 전현직 주요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이자 한국 사법부의 초석을 세운 가인 김병로 선생 서세 50주년을 맞아 열린 추념식.
양승태 대법원장은 가인 선생이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건 대한민국의 큰 축복이라며 청렴하고 강직했던 고인의 삶을 기렸습니다.
가인 선생의 손자로 유족 대표로 추념식에 참석한 김종인 전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은 부끄러움이나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조부를 추억했습니다.
추념식과 함께 가인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50주기 특별전도 함께 열렸습니다.
198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김병로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변호인으로, 해방 후에는 사법부의 기틀을 세운 대입법가로, 초대 대법원장 재임기간에는 사법부의 존엄과 권위, 독립성을 확립한 강직한 법조인으로, 평생을 자유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온 인물로 평가됩니다.
또 가인,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 없는 거리의 사람이란 뜻으로 선생이 직접 붙인 아호에서 알 수 있듯이 평생 절제되고 청빈한 삶을 산, 모든 법관과 공직자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KTV 김경아입니다.
(KTV 국민방송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ch520 www.ktv.go.kr )< ⓒ 한국정책방송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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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나라의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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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에서 사법부 주요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추념식과 특별전이 열렸는데요.
김경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사내용]
양승태 대법원장과 황찬현 감사원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 등 사법부의 전현직 주요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이자 한국 사법부의 초석을 세운 가인 김병로 선생 서세 50주년을 맞아 열린 추념식.
양승태 대법원장은 가인 선생이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건 대한민국의 큰 축복이라며 청렴하고 강직했던 고인의 삶을 기렸습니다.
가인 선생의 손자로 유족 대표로 추념식에 참석한 김종인 전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은 부끄러움이나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조부를 추억했습니다.
추념식과 함께 가인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50주기 특별전도 함께 열렸습니다.
1988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김병로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변호인으로, 해방 후에는 사법부의 기틀을 세운 대입법가로, 초대 대법원장 재임기간에는 사법부의 존엄과 권위, 독립성을 확립한 강직한 법조인으로, 평생을 자유와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온 인물로 평가됩니다.
또 가인,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 없는 거리의 사람이란 뜻으로 선생이 직접 붙인 아호에서 알 수 있듯이 평생 절제되고 청빈한 삶을 산, 모든 법관과 공직자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KTV 김경아입니다.
(KTV 국민방송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ch520 www.ktv.go.kr )< ⓒ 한국정책방송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통령과도 당당히 맞섰던 '법관'..가인 김병로
【 앵커멘트 】
오늘(13일)은 우리나라 법의 기초를 세운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의 50주기였습니다.
법치를 위해 대통령과도 당당히 맞섰던 가인의 족적은 이 시대 법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강현석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
구한말 유학자의 후손으로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한 김병로 선생.
1년 동안의 판사생활을 접은 뒤 곧바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에 뛰어듭니다.
해방 뒤 대쪽같은 성격의 초대 대법원장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합니다.
독재에 반대해온 국회의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데 항의하자,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될 일'이라고 일축했을 정도로 '법치'를 강조했습니다.
피란길에 집필한 민법과 형법 초안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법의 근간이 됐을 정도입니다.
50주기 추념식에서 후손들은 그를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산 인물로 기억했습니다.
▶ 인터뷰 : 김종인 / 전 청와대 경제수석 (손자)
- "저희 조부께서는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소위 국가에 기여를 해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사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치와 사법부 독립을 위해 절대권력과도 당당히 맞선 가인의 족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법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MBN뉴스 강현석입니다. [wicked@mbn.co.kr]
‘더민주’ 합류 김종인은 누구?…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친손자’

‘더민주’ 합류 김종인은 누구?…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친손자
김종인 전 의원이 14일 더불어민주당 조기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됐다.
이번 김종인 조기 선대위원장의 영입은 문재인 대표의 ‘호남 민심 달래기’ 차원에서 호남 출신 외부인사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앉히겠다는 방침에 따른 영입으로 보인다.
김 전 의원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친손자로, 김 선생의 고향은 전북 순창이다.
김 전 의원은 제 24대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또한 2004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제17대총선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은바 있다.
2012년에는 박근혜 대선경선캠프 ‘국민행복캠프’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동아경제 기사제보 eco@donga.com
가인 김병로 선생의 발자취, 함께 따라가요~
https://www.youtube.com/watch?v=quco96M-n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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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 김병로 길 도로명판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
서울시 도봉구는 지난 8월 27일 초대 대법원장이자 인권변호사였던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의 옛 집터 인근에 ‘가인 김병로 길’이라는 명예도로명주소를 부여했다. ‘가인 김병로 길(Gain-KimByungro-gil)’이라는 명예도로명이 부여된 곳은 도봉로136길 1에서부터 도봉로136길 130까지의 640m 구간이다. 가인의 옛 집터 인근인 창동 북한산아이파크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쌍용아파트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김병로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 지어진 ‘가인초등학교’와 ‘가인지하차도’와 인접한 곳이기도 하다.
김병로 선생의 옛 집터는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구색을 갖추지는 못했다. 옛 집터로 가려면 대로변의 한 모텔을 끼고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야 한다. 그러면 낡은 빌라 한 채가 서 있는데 바로 그곳이 가인 김병로 선생의 옛 집터다. 이를 알려주는 것은 ‘김병로 선생의 옛 집터’라고 쓰여 있는 자그마한 푯말이 전부다. 가인의 옛 집터는 이미 오래전에 민간에 팔려나가 보존하지 못했다는 것이 도봉구 측의 설명이다. 다행히도 가인 김병로 길에는 그의 호를 딴 ‘가인초등학교’와 ‘가인지하차도’가 인접해 있어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김병로 선생의 호인 가인(街人)에는 ‘거리의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라를 잃고 설움을 겪는 동포를 생각하며 스스로 지은 아호다. 그의 아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평생을 나라를 위한 청렴한 법조인으로 살았다.
- ▲ 가인 김병로 선생 옛 집터 앞에 푯말이 세워져 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전북 순창 출신으로 유년 시절 의병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니혼대학과 메이시대학 등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919년 판사로 임용된 그는 1년 만에 변호사의 길로 돌아섰다. 무료로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해 주는 민족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떨친 건 그때부터다.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사법부의 독립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며 이승만 정부와 대립한 바 있다.
김병로 선생이 창동에 터를 잡은 것은 1932년의 일이다. 창씨개명을 요구받는 등 사상사건의 변론 등에서 제한을 받게 된 김병로 선생은 이곳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13년간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창동역 일대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속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10월 11일 경원선 용선~의정부 구간의 개통으로 서울 진입이 쉬워지면서 이 지역은 일제의 눈을 피해 떠돌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김병로 선생이 창동역 주변에 처음으로 이주해 온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이동진 구청장의 말이다.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저명인사에 대한 회유가 극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김병로 선생은 ‘차라리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지, 일본에 부역하지는 않겠다’는 결심하에 창동으로 내려와 터를 잡으셨다고 합니다. 그곳은 일본의 감시망에서 벗어나면서도 서울을 편히 오갈 수 있는 곳이었죠.”
- ▲ 이동진 도봉구청장 photo 도봉구청
자치단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도봉구는 어떤 연유로 명예도로명주소 사업을 시작하게 됐을까. 이동진 구청장은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20년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기초자치단체인 ‘구’의 경우는 역사나 문화의 정체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서울시만 해도 모든 구가 ‘서울’로서 통칭되는 편이지 ‘구’로서 특색을 가진 곳은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지방자치 시대에 주민들 내부에서 역사 문화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주민 간의 통합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구청장은 도봉구만의 역사 문화 정체성을 만들고자 취임 초기부터 도봉구 일대의 역사적 자산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 등 당대 최고 지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인물들이 창동에 많이 거주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인들이 살았던 집터를 일일이 확인해서 표석을 만들었다. 이 구청장은 시의원을 역임하던 2004년 김병로 선생의 호를 딴 가인초등학교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도봉구에 새로 건립되는 초등학교를 김병로 선생의 호를 따서 짓자고 명명을 추진했던 것이다.
가인 김병로 길은 5년간 사용된 후 도로명주소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연장 여부가 결정된다. 도봉구 측은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도로명주소 연장이 무리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동진 구청장은 지역의 역사적 인물을 기억할 수 있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앞으로도 도봉구의 역사적 인물들을 발굴해내고 그분들을 기억할 수 있는 다채로운 사업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이러한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주민들이 어느 정도 역사적 인물과 우리 지역 간의 연관성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겠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며 지역의 위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나갈 것입니다.”
도봉구는 가인 김병로 길 이외에도 ‘김수영 길’ ‘함석헌 길’ ‘간송 전형필 길’ 등 3명의 인물에 대해서도 명예도로명을 부여했다. 또한 ‘도봉 현대사 인물길 코스’와 ‘역사 문화 관광길 코스’ 등을 만들어 지역 주민들이 바른 역사관과 시대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탐방코스도 마련했다.
명예도로명 부여의 법적 근거는 도로명주소법 제8조의 2 및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의 5 제2항이다. ‘도로명이 부여된 도로 구간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하여 도덕성, 사회헌신도, 공익성 등이 우수한 사람의 이름을 명예도로명으로 부여 가능’하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이재원 교수는 이러한 사업을 추진할 때 깊은 고민이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현재처럼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첨예한 가운데 역사적 평가를 도외시하고 이데올로기적 잣대를 들어 평가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인물을 거리 이름으로 사용할 때 신중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정치가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가운데 심도 있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평가에 근거하여 인물을 선택해야 합니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고 그들을 기리는 명예도로명주소를 부여하는 것은 자치단체 차원에서 이뤄지는 과거와의 뜻깊은 교감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자치단체 도봉구의 행보가 주목받는 이유다
[변협의 숨은 역사(31)]변호사, 정치인 가인 김병로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법조인들의 정치입문과 출마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법조인(판사, 검사, 변호사)의 역할을 넘어서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협회 공보이사 출신으로 협회의 숨은 역사를 쓰고 있는 나에게 이 계절에 생각나는 정치인이 있다. 바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인 김병로 선생이다.
대부분의 국민을 포함하여 우리 법조인들은 가인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정권에 맞서 법원의 독립을 지킨 훌륭한 대법원장으로 기억할뿐 변호사나 정치인으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초대 대법원장을 마치고 정치적 행보를 계속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사실 일제시대때 판사(1919년 부산지법 밀양지원 판사) 를 1년간 하다가 개업(1920년 4월 개업)한 변호사이다. 1926년에는 경성 조선인변호사회 회장도 하였으니 나름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모양이다.
일제시대의 법조인이라면 친일파 낙인을 벗어나기 쉽지 않은데 주로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한 가인은 친일파 논쟁에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사람이다. 해방 후 그는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였고, 미군정에서 사법부장을 역임하으며,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지금의 정치와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정치적이었다. 그가 순수한 법률가로 머물렀다면 아마 초대 대법원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관심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가인의 모습은 대법원장을 마친 이후의 삶이다.
대통령인 이승만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쓰다 보니 법에 앞서는 정치의 힘을 실감했기 때문일까? 대법원장을 퇴임한 후 가인은 정치인의 길을 선택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가인을 주축으로 1960년 6월 18일 40여명의 변호사들은 7·29 민주선거에 다수 법조인의 진출을 돕고 자유로운 정치활동과 발언이 보장된 사회를 위하여 자유법조단을 창단하였다.
가인은 대법원장을 지낸 원로로서 측면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고향인 전라북도 순창에서 자유법조단 대표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낙선시킨 상대후보는 군법무관 출신인 민주당의 홍영기 변호사였다. 가인은 다시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한민국 4대 대통령 간접 선거에도 출마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이 당선된 바로 그 선거다. 1표만 득표하여 역시 낙선하였다.
가인은 1961년 5·16 혁명 이후에도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동아일보’를 통하여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기고하였고, ‘사상계’에 ‘군정 연장과 국민투표에 대하여’를 기고한 뒤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군정 종식을 촉구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 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 작업 등을 하였다.
1964년 1월 13일 간장염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자택에서 향년 78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정치인이라는 관점에서 가인의 삶을 보면 초대 대법원장이 된 것이 기적에 가깝고 그는 야당 정치인, 약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살았다. 법의 정신이나 정치의 정신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모험의 길을 떠나는 많은 정치 지향 법조인들에게 실패하였지만 존경받는 정치인으로서의 가인의 모습이 혹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http://news.koreanbar.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957
[조용헌 살롱] [1025] 1독 2매 1갈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주식과 정치 판세를 잘 읽으면 돈과 권력이 온다. 판세는 높이 올라가서 볼수록 잘 보인다. 몇 층 높이에서 보느냐에 따라 관점이 다른 것 아니겠는가?
높이 올라가는 동물을 찾다 보니 날개 달린 조류이다. 조류 중에서도 맹금류(猛禽類)가 창공을 지배한다. 필자는 그동안 정치 판세를 잘 읽는 맹금류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한 마리의 독수리와 두 마리의 매, 그리고 갈매기 한 마리가 있다. 김종인이 독수리. 윤여준과 이해찬이 매, 김한길이 갈매기가 아닌가 싶다.
김종인은 10여 세부터 할아버지인 가인 김병로 슬하에서 정치 판세 분석을 훈련받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선거 유세장에 나가 '누가 우세한지, 누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을 하는지'를 조부에게 보고하는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할아버지 사랑방에 드나드는 당대의 정객들에게 재떨이 심부름과 약주 심부름을 하면서 눈썰미와 정치 감각을 익혔다. 일찌감치 영재교육(?)을 받았던 셈이다.
윤여준의 부친은 윤석오이다. 윤석오는 5000석을 했던 부잣집 아들이고 한학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윤석오는 위당 정인보의 제자이고 고하 송진우의 추천을 받아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윤여준도 어렸을 때부터 양반 집안의 예법을 익혔으며,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를 드나들며 정치 감각을 익혔다. 김종인, 윤여준 모두 여당에서 경력을 쌓다가 말년에 야당 쪽으로 넘어갔다. 보수와 진보의 양쪽 정서를 모두 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70대 후반까지 콜을 받는 것이다.
이해찬과 김한길은 DJ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DJ는 대부분 어려운 상황에서 선거를 치렀다. 예리한 판세 분석과 치밀한 전략을 갈고닦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이해찬은 관상도 밭 전(田) 자 형태이다. 실용적 관상의 전형이다. 눈도 맹금류에 해당한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여론조사 기법도 익혔다. 관상은 밭 전(田), 눈은 매, 학벌은 서울대라는 3종 세트가 결합된 당대의 매가 이해찬이다. 갈매기는 김한길. 혁신 정당의 당수를 지낸 부친 김철의 유전자를 무시할 수 없다. 매보다는 한 급 아래이지만 갈매기도 꿈이 있고 높이 나는 조류 아닌가?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24/20160124022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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