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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렌즈에 담긴 여수-순천사건.."갈라선 나라"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이 ,1948년 4월 3일,제주4·3 사건

나레 2016. 4. 30. 10:56


푸른 눈의 렌즈에 담긴 여수-순천사건.."갈라선 나라"

故 칼 마이던스의 사진 기록물 재조명..주로 피난민 참상 담아



故 칼 마이던스의 사진 기록물 재조명…주로 피난민 참상 담아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이 사건을 다루는 일은 힘도 들뿐더러 두려움이 앞섰다. 기사를 쓰는 순간에도 소총과 자동화기 소리가 들려 전쟁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데이비드 던컨과 함께 20세기 최고 종군사진기자이자 포토 에세이의 개척자로 꼽히는 미국 사진기자 고(故) 칼 마이던스. 그가 남긴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기록물들은 비교적 알려진 편이다.

재미사학자 유광언씨가 27일 마이던스 사진들을 당사자의 직접 설명과 함께 다시 소개해 관심을 끈다. 유씨는 올해 2월 연합뉴스를 통해 던컨의 기록물을 선보인 바 있다.

유씨가 주목한 건 작품의 제목이다. 당시 '라이프'지의 작가였던 마이던스는 여수-순천 사건의 기록물들에 '갈라선 나라(House Divided)'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성경 마르코복음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가 2004년 타계해 정확한 인용 연유를 알 길은 없다. 다만 여수-순천사건 후 대한민국 분단의 골이 더 깊어지고 나아가 영구 분단 상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을 것으로 유씨는 추정했다.

실제로 라이프지도 여수-순천사건을 두고 "앞으로 다가올 한국전의 잔혹한 서곡"이라고 예견했다. 1947년 라이프지의 일본지국장이 된 마이던스는 한국을 오가며 보도 활동을 하던 중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이 발발하자 현장 취재에 나섰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됐을 때도 제일 먼저 달려와 1952년까지 전선을 따라다녔다.

그의 주제는 항상 최전방에서 싸우는 사병과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은 피난민, 학살당한 민간인과 군 포로들이었다.

1948년 10월19일 반란 후 여수를 탈환한 진압군이 공산당원을 솎아내 재판에 회부하려 이동시키는 장면, 순천 반군에 의해 처형된 인사의 시체 앞에서 오열하는 가족들과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미국 고문관의 침통한 표정도 고스란히 담겼다.

반란군에 의해 처형된 시신들을 지키는 부녀자들, 순천의 한 학교 운동장 옆에 총탄 자국이 선명한 반군의 시신들, 먼 곳에서 집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는 주민, 군용트럭에 묶인 반군들의 모습도 가감 없이 그대로 담아냈다.

반군 동조자로 의심받은 어린 학생들이 구금된 모습, 진압군에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양손을 들어 보여주는 주민들을 찍은 사진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하다.

마이던스는 "밤이 되자 반군은 가가호호 수색해 우익성향의 인사를 즉결 처분하든지 집결지로 끌고 가 집단으로 총살했는데 2∼3일내 500명 이상을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또 "순천을 탈환한 진압군도 잔인하긴 매한가지였다. 아기를 등에 업은 부녀자들이 보는 가운데 그들의 남편이나 아들을 몽둥이, 소총 개머리판, 심지어는 철모로 구타했고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고 적었다.

유씨는 이외에도 1944년 10월 필리핀에 상륙한 맥아더 장군의 모습, 1945년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군 대표의 모습을 담은 마이던스의 사진도 새롭게 소개했다.

유씨는 "항복문서 서명 장면에선 윤봉길 의사가 1934년 던진 폭탄에 맞아 왼쪽 다리가 절단, 지팡이에 의지한 외무대신 시게미쓰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고 말했다.

lis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http://media.daum.net/politics/newsview?newsid=20160430071618772




                                                             


[정리뉴스]제주4·3 사건을 “남로당의 무장 반란”으로 규정…어떻게 생각하세요?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규정한 제주 4·3 사건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청소년용으로 제작·보급한 만화책 <6·25 전쟁>에서 제주 4·3 사건을 “제주 남로당의 무장 반란”이라고 편파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미 정부 차원의 조사가 끝나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사과까지 한 사건의 의미를 부정하고 뉴라이트적 시각을 강화한 셈인데요.

박물관은 지난해 1월 한국 근현대사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만화책 3권 <6·25 전쟁>, <대한민국의 태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획한 후 1년여 동안 제작해 지난해 11월 중·고등학교 도서관, 국공립도서관 등에 배포했습니다. 3000부씩 총 9000부를 제작·배포하는 데 1억4900만원을 썼다고 하네요.

박물관은 이 만화에서 “1945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 반란이 일어났다. 극심한 혼란이 계속되자 정부는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며 남로당 ‘무장 반란’으로 정부 작전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서술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1945년, 이상하죠? 1948년 일어난 사건을 1945년(21쪽)이라고 잘못 기술한 것인데요. 기본 오류 중 기본 오류입니다. 이밖에도 편파적인 서술과 사실 오류 등이 발견됐습니다. 우선 만화 내용(19~23쪽)을 직접 보시고 판단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주도민들의 저항 생략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했고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4월 3일을 국가 공식 기념일인 국가추념일로 지정하기도 했죠.

문제는 이 만화가 경찰의 과잉 진압에 제주도민들이 저항한 사실은 생략하고 제주도민의 반발이 남로당의 획책 때문이었다는 식으로 단순화한 점입니다. 만화는 “사태가 악화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주의자 소탕작전에 박차를 가한다. 1949년 5월이 돼서야 무장 반란세력이 대부분 소멸된다”고 서술하고 있는데요. 제주도민들의 역할을 소거하면서 남로당의 획책으로 ‘반란’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규정하고 정부 진압을 정당화하는 것이죠. 당시 친일 경찰들의 횡포나 토벌대의 과도한 진압은 축소하고 사태를 ‘폭동’이라 몬 뒤 ‘잘 진압했다’는 식으로 정리하면서 정부의 잘못은 사라지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는 식으로 단순화한 것입니다.

제주 4·3연구소 김은희 상임이사는 “당시 제주도는 3개 선거구 중 2개에서 5·10 선거가 무효가 될 정도로 선거 참여율이 낮았다”며 “남로당이 주민들을 선동한 게 아니라 도민들이 단독 정부를 반대했기 때문에 남로당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민간인이 희생됐는데 ‘소탕’이라니…

21쪽에는 “1949년 5월이 돼서야 무장 반란세력이 대부분 소멸된다”는 서술과 함께 군인이 “소탕 끝”이라며 만세를 부르며 웃고 있습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조한경 전 회장은 “제주 남로당의 무장 봉기가 시작인 것은 맞지만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국가 폭력 때문에 현재는 ‘폭동’이 아닌 ‘사건’으로 용어가 정리된 상황”이라며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 사망했고 그 대부분이 민간인임을 감안한다면 ‘소탕’이란 단어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했습니다.

조 전 회장은 “만화 내용이 전두환-노태우(4-5차) 정부 시기의 국정교과서 서술과 비슷하다”고 말했는데요. 한 번 비교해보실까요.


▶4차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전두환 정권)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제주도 폭동 사건과 여수·순천 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제주도 폭동 사건은, 북한 공산당의 사주 아래 제주도에서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였다. 공산당들은 도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후, 우리 나라는 군경의 활약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은 제주도 폭동과 마찬가지로 대한 민국을 혼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5차 고등학교 국정교과서(노태우 정권)

“공산주의자들은 남한 내의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취약점을 이용하여 교란 작전을 폈다. 대한 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그들은 제주도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 등을 일으켰다. 제주도 4·3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 폭동이었다. 그들은 한라산을 근거로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군경의 진압 작전과 주민들의 협조로 평온과 질서를 되찾았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은 새로이 수립된 대한 민국을 혼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탄약고, 병기고를 파괴하는 한편, 관공서,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과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국군의 활동으로 곧 진압되었다. 이러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교란 작전은 그 후에도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4차 교과서는 ‘제주도 폭동 사건’이라고 지칭하죠. 왜 만화 내용이 4-5차 시기의 국정 교과서 내용이 겹쳐 보일까요. 이만큼 역사 서술은 후퇴한 걸까요.


■미군정 상황에 태극기까지…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실 오류도 여럿 발견됐습니다. 1947년 상황을 그린 20쪽에서는 그해 3·1절 기념식 때 경찰 발포로 6명의 무고한 시민이 사망한데 대해 제주도민이 분노한 상황에 대한 언급 없이 남로당원들이 “정부에 반대하면서 선동하겠어”, “분탕질을 하자”고 말하는 것으로 그려 모든 것을 남로당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때는 미군정 상황인데도 태극기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19쪽에서는 ‘건국 직후의 반정부 태풍’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는데 이 시기는 1948년 2월 남한만의 단독 선거 결정 이후의 상황이죠. 정부 수립 전후의 상황으로 ‘건국’이라는 용어가 부적절합니다. 김용직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임시정부는 민족운동단체이지, 정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는데요. 1월 임명된 김 관장은 지난해 10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지 성명에 이름을 올렸고 2008년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이 만든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집필진이기도 합니다. 이 만화는 지난해 제작된 것이라지만 왜 따로 떼어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까요?

만화책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4장 제목은 ‘대한민국 수립’으로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습니다”라고 서술돼 있습니다. 또 ‘대한민국 수립 이후’, ‘대한민국 수립은 국제사회가 부여한 정통성을 확보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서술이 반복되는데요. 올해 발행된 초등학교 사회과 국정 교과서에도 ‘정부’가 빠지고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나와서 논란이 됐죠.

2016년 발행된 초등학교 사회과 국정교과서.

뉴라이트 쪽에서는 계속 1948년이 건국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이 주장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1945년 독립 이후 정부 수립 과정에 주도 세력으로 참여한 친일파를 미화할 우려가 있어 계속 논쟁이 되어 왔죠. 임시정부는 정부가 아니라는 박물관장, 그리고 그 박물관에서 만든 편파적인 이 만화, 어떻게 봐야 할까요?

http://h2.khan.co.kr/201604011707531




<김관후의 4·3칼럼> (60) 미군사고문단장을 겸임한 주한미군사령관 윌리암 로버츠    

로버츠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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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관장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가고 있다.(1945.9.9.).

‘로버츠가 이범석 국무총리에게 보낸 서신/ 수신: 국무총리 이범석 (중략) 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한국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을 통과하여야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후략)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공한(公翰) 1948년 9월 29일 


'4·3항쟁의 진압과정에서 미군정, 미군사고문단이 채택한 우익테러단체 투입, 방화-소개-초토화전술, 민간인 대량살상전술 등은 미국이 이후 한반도 본토의 게릴라전, 한국전쟁, 베트남,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전세계의 광법위한 지역에서 현지 민중들을 상대로 동일하게 재현하는 진압작전의 한 선례이기도 하였다. 그린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에서의 미국의 실험은 ‘고도의 의도된 실험’이었다. 그 실험의 와중에서 제주도는 미군과 한국정부의 ‘대공투쟁의 전초기지로서 그 시험무대’였던 것이다.’-박명림,『제주도 4·3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고려대, 1988).153~154쪽    

‘(M 일밤 11시 30분) 당시 미국극동함대와 제3함정소속함대가 공조해 제주 인근 해안을 봉쇄하고 있었다는 문서는 계엄군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장군의 증언 “한국군은 인식하지 못한 채 미국을 대신해 피를 흘리고 있다”는 미군사고문단 로버츠 단장의 개인비밀문서 등을 통해 제주초토화작전에 미국의 책임이 있음을 밝힌다. 단 3만 명의 희생자 가운데 다수가 무고한 양민이었다는 한국군사고문단 반더풀 상사의 비밀편지를 공개한다. 일본 나라현에 사는 전 무장대원 김시종씨는 4·3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없는 상태에서 모험주의적으로 일어난 봉기였고, 초토화작전 시기에는 무장세력은 이미 궤멸상태였다고 증언한다. 새롭게 드러난 양민학살매장지도 공개한다. 조연현 기자’-한겨레신문 1999년 9월 11일   

제주4·3사건은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제주지구 사령관이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계속 보유하였고, 제주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하였다.  

이승만은 일반명령 제31호로 한국군을 지휘 통제할 '임시군사고문단(PMAG)'을 설치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동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John R. Hodge) 주한미군사령관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체결했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주한미군사령관은, 본국정부의 지시에 따라서 또한 자기의 직권 내에서,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하여 조직, 훈련, 무장할 것을 동의한다. 제2조, (중략) 미군철수의 완료시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공동안전을 위하여 또는 대한민국 국방군의 조직, 훈련 및 장비를 용이케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대한민국 국방군(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및 비상지역에 주둔하는 국립경찰파견대를 포함함)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하는 권한을 보유할 것으로 합의한다.”

1948년 8월 26일 트루먼 미국대통령의 특사 무쵸(John J. Muccio)가 ‘주한 미국고문사절단’을 이끌고 내한하고, 그 산하에 ‘임시군사고문단'이 설치되었다. 단장은 윌리암 로버츠(William L. Roberts) 미군 준장이다. 로버츠는 이미 1948년 5월 20일부터 미군정 통위부 고문관으로 복무하던 중 새롭게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직을 맡게 되었다. 제주도의 고문관으로는 버제스(F.V.Burgess) 대위가 임명되었다. 

다음날인 1948년 8월 27일 미군정 3년 동안 38선 이남을 통치했던 하지(John R.Hodge) 중장이 한국을 떠나고 후임에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24군단장으로 콜터(John. B. Coulter)가 부임한다. 그리고 5개월 후 콜터가 지휘하던 미24군단은 49년 1월15일 일본으로 떠나고,  로버츠 임시군사고문단장이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임하게 된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동년 9월 29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 고문관을 통과해야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작전통제권의 주체와 그 영향력에 대해 쐐기를 박았다. 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1948년 8월 16일부터 1949년 6월 30일까지이다. 

제주4·3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도의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 범위에 포함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소개(疏開)시키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사태의 조기진압을 위해 초토화작전(대량살육작전 : A Program of Mass Slaughter)이라는 강경 진압 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로버츠 준장은 당시 50대 중반으로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미군정 통위부(현재로 말하면 국방부) 고문관(48.5.20~48.8.24), 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48.8.26~49.6.30), 주한미군사령관 겸임(49.1.15~49. 6.30)의 직책을 맡았고, 1949년 7월1일부터 6.25가 발발한 1950년 6월까지 ‘미군사고문단(KMAG)' 단장을 맡았다. 고문단의 규모는 500명 정도이고, 6.25이후는 2000명까지 늘어났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여기서 미군은 비껴갈 수가 없다.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24군단장 콜터 장군, 그리고 로버츠 준장을 빼놓을 수 없다. 또 직접 제주도에서 초토화작전을 수행한 9연대 미군고문관 버제스 대위를 빼놓을 수 없다.  

미군정은 1945년 8월 16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 동안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였다. 그들은 제주섬을 피로 물들인 유혈사태를 끝내 막지 못했다. 오히려 강경진압작전으로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제주민중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그들의 의무와 책임을 분명히 방기한 것이다. 

미군정 3년, 그리고 정부수립 뒤 한국군을 장악한 미군은 한반도에 반공의 방벽을 튼튼히 쌓기 위한 냉전정책의 일환으로 제주섬을 짓밟았다. 제주4.3을 좌·우익의 이분법으로 접근하여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이끌었다.  

또 로버츠는 박정희(朴正熙)를 살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만주국 장교로 근무하다가 1946년 7월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며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가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어 1948년 11월 11일 채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의 구명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백선엽은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와 로버츠 육군준장에게 박정희의 구명을 요청했고, 박정희에 대한 형집행정지를 얻어내었다. 그 후 박정희는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제주해역 경계 강화/ 발신: 임시군사고문단장/ 수신: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대령/ 참조: 국방부 장관, 경비대 참모총장, 한국군 고문관 (전략) 9. 제주도/한국군 해안경비대의 순찰에 불구하고 공산주의자 잔당들이 제주도와 남해안의 작은 섬으로 피신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인다. 이들 지역의 순찰과 경계를 강화하여 문제가 될 대규모 단위의 집결을 막아야 한다. (후략)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공한(公翰) 1948년 10월 28일

‘제주도 작전 / 남원리 습격/ 수신: 주한미군사령관/ 발신: 미군사고문단장(전략) 3. 제주도-침입자들은 제주도 남원에서 약 700여 채의 가옥을 불사르고 약 55명의 민간인을 살해하였다. 보고에 의하면 침입자는 약 500명이며, 그 중 몇 백 명은 비무장인 것으로 되어 있다. 때늦은 제보를 받은 후 군대가 추적 중에 있다. (중략) 12. 제주도 주둔 연대장은 11월 20일~11월 27일 동안에 122명의 반란자들이 생포되었고, 576명이 사살되었다고 보고하였다. 10월 1일에서 11월 20일 사이에 1625명이 사살되었고 1383명이 생포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많은 물건들이 노획되었으나 약간의 일본식 소총이 노획되었을 뿐이다. 2개월 동안 총 60여 개의 무기가 노획되었다. 미군사고문장 로버츠(W. L. Roberts)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공한(公翰) 1948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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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 로버츠 준장, 하우스만 대위, 무초 대사.

로버츠와 미군사고문단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사령관(중략) 2. 제주도 주둔 고문관들은 W-day까지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며 비행기지 분견대와 함께 생활할 것이다. 고문관들에게 고지될 것이다. 3. 제주도의 2개 대대의 동절기 막사 건축을 위한 계획이 진행 중이다. (후략)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 Weekly Activities) 1948년 9월 13일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제24군단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전략) 9. 제주도: 11월 12일의 보고는 다음의 사항을 의미한다. 월평마을을 포함하여 수많은 마을이 불탔으며, 150명의 게릴라들에 의하여 제1대대 본부가 공격당했으나 사상자는 없었음. 4명의 게릴라 사망. 마을주민의 제보에 따라 2대대는 게릴라의 은거지를 습격하여 1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체포. 후에 4명을 추가로 사살. 2대대 F중대는 한림근처의 창고에서 게릴라를 체포. 25명 사살, 3명 포로. 3대대는 다른 지역에서 불탄 마을의 주민을 도와 옷과 식량을 지급. 경찰과 견실한 협조. 주민들은 현재 정보를 제공하는 등 협조적. CIA활동 우수함. 2개 중대를 추가로 제주도에 파견하려는 계획은 한국군에 의하여 취소. 현재의 3개 대대를 주로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충원하려는 새로운 계획.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 Weekly Activities) 1948년 11월 15일

‘제주도 작전의 주간요약/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제24군단 작전참모/ 참조: 제7사단장/한 주에 있었던 제주도 작전에 관한 요약보고. 수석고문관으로부터 받은 보고임./11월 24일: 적 5명 사살 (교래리)  적 3명 사살, 16명 포로 (조천리) 적 6명 사살 (서귀포) 11월 25일: 적 70명 사살 (성산포) 적 50명 사살, 11명 포로 (한동리) 11월 26일: 적 4명 사살 (토평리) 적 59명 사살, 129명 포로 (교래리) 11월 27일: 적 43명 사살, 51명 포로 (선흘리) 적 18명 사살 (어승생악) 적 17명 사살, 110명 포로 (한동리) 적 3명 사살, 5명 포로 (토평리) 11월 28일: 적 64명 사살 (수장악) 전체 337명 사살, 322명 포로. 총기 7정 노획/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 Weekly Activities) 1948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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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7사단 32보병연대의 진주를 환영하는 서울시민들(194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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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9군정중대는 1945년 11월 9일 제주도에 상륙했다.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제59군정중대로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는 모습을 1948년 5월 1일 촬영한 것.

‘1주일간 게릴라 503명 사살/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전략) 6. 제주도: 제9연대는 제2연대와 교체. 600명의 게릴라들이 1월 1일 제2연대를 급습, 30명의 게릴라 사망, 10명의 포로, 경비대 사망자 없음. (중략) 9. 12월 21일~28일 제주도: 전체 사망자 503명. 전체 포로 176명. 총 17정 노획 (후략)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 Weekly Activities) 1949년 1월 4일 

해방이 되자 미국은 38선 이남을 군사력으로 점령하고 직접 통치했다. 제주도 군정은 1945년 11월 9일 제59군정중대가 상륙하면서 실시되었다. 이듬해 8월 1일 미군정은 군정청 법령 제94호로 ‘제주도제’를 실시했다. 군정이 실시된 지 2년 5개월 뒤 제주4·3이 발발했다. 미군정은 4·3의 불시를 제공했고,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8월 26일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그들은 1949년 6월 30일까지 활동했다. 7월 1일에는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이 임시군사고문단의 후신으로 공식 창설됐다. 그래서 대량학살이 이루어지던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책임은 로버츠가 중신인 임시군사고문단에 있다. 

한국군에 대한 임시군사고문단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임시군사고문단 요원 가운데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을 지낸 하우스만 대위는 회고록에서 정부 수립 후부터 자신을 포함해 이승만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총참모장, 로버츠 고문단장 등 6명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를 매주 열었다고 증언했다. 

로버츠가 수행한 업무만으로도 제주4.3에 그들의 직접 개입 여부를 알 수 있다. 그는 제주도 작전에 관한 모든 상황을 제주도에 파견한 고문관으로부터 보고 받고, 이를 다시 매주 정기적으로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이범석 총리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군 작전에도 일일이 관여했다. 그는 또 CIA, 송요찬 9연대장, 서북청년회를 강경진압작전의 핵심으로 적극 활용했다. 미군 스스로 ‘과격한 반공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는 서북청년회를 군에 대거 투입함으로써 천인공노할 작전을 벌였다.

그리고 로버츠는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이 ‘계엄법’이 없는데도 계엄령을 선포하자 한국군 지휘관들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12월 1일 국방부에 계엄령에 관한 문서를 보내 해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미군은 초토화작전 직전까지 ‘괴잠수함 출현설’ 등을 흘리며 살육작전의 명분을 만드는데 급급했고, 초토화작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정찰기를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다.   

로버츠 준장은 미24군단이 1949년 1월 15일 부대 해체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자 주한미군사령관까지 겸임하게 된다. 그는 동년 3월 11일 미 대사관 드럼라이트(Everett Drumright) 참사관에게 “제주도에 CIA를 설치 운영하도록 하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육군부 기획작전국장인 볼트(Charles L. Bolte) 소장에게 미군이 철수한 후의 고문단 존재 이유에 대해 “한국군은 미국인 대신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도 연대장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48년 11월 20일부터 27일까지 일주일간 유격대 122명을 체포하고 576명을 사살했다. 10월1일부터 11월20일 사이에는 1625명을 사살하고 1383명을 체포했다. 많은 물건들을 노획했으나 무기는 거의 없었다』-임시군사고문단(PMAG) 단장 로버츠 준장 공한철, 48년 12월1일자

‘서북대대·서북출신 경찰 본토 복귀/ 발신: 로버츠(Roberts) 장군/ 수신: 신성모 장관/ 다음은 오늘 우리가 토의한 내용의 목록을 귀하에게 고지하는 바입니다. 제주도 병력의 본토 복귀/ 한국군 참모부는 현재 1개 대대(가급적이면 제2연대의 서북대대)를 본토로 복귀시킬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후에 추가로 제2연대의 1개 대대나 혹은 그 이상의 병력이 제주도에서 본토로 보내질 것입니다. 서북출신 경찰의 제주도에서 제거/ 현재 제주도 경찰에 편입되어 있는 문제의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을 본토로 복귀시켜 널리 분산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유(재흥) 대령/ 본인은 지난달동안 제주도의 소요를 진압하는데 가장 뛰어난 방법으로 임무를 수행했던 제주도 제2연대의 유 대령의 이름을 염두에 둘 것을 제안합니다. 본인은 제주도 도지사에 그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관행은 미국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것입니다. 해당 장교에게 말미를 주고 후에 다시 군대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본인은 제주도 주민들로부터 대단한 신뢰를 받고 있는 유 대령이 도민들에게도 무난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유 대령이 군대로 복귀할 때 책임을 맡을 제주도 출신 부지사를 물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공한(公翰) 1949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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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경 암살사건 조사차 제주에 온 로버츠 준장(왼쪽, 1948.6.18.).

계엄령(martial law) 선포와 대량학살 책임


‘4·3봉기는 오히려 미 제국주의가 먼저 민중을 유도하여 민중이 일어나면 되받아치는 작전으로서 계획적이요 의도적인 하나의 민중공격작전이었다.’-김명식, 『제주민중항쟁 1』(소나무, 1988).15쪽

‘제주도에 경찰 1천명 배치/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사령관/ 국방부 활동(1948년 8월 29일~9월 4일) 1. 현재 1개 대대만 주둔할 수 있는 막사가 확보됨에 따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2개 대대의 동절기 대비 본토로 귀환하도록 조언하였음. 1000명의 경찰이 최근 제주도의 부락들에 배치되었음. (중략) 9. 제주도에 3개의 무선국이 가동 중. (중략) 18. 제주도의 미군고문관들은 광주에 거주하면서 배로 제주도에 출퇴근하며, 4일 동안 제주도에 남아서 근무하게 된다. 외딴 지역에 있는 방과 집들을 계속 보유하고 있다. 식량보급이 수행 될 것이다. (후략) 미육군 준장 로버츠(W. L. Roberts)’-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공한(公翰) 1948년 9월 7일

1948년 6월 18일 새벽 제11연대장 박진경(朴珍景) 대령이 그의 숙소에서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로버츠도 박진경의 진급식에 참석했고 그가 암살당했을 때 직접 제주에 내려왔다. 박진경이 암살당하자 미군사령부는 6월 21일 새로운 11연대장에 최경록(崔慶祿) 중령을, 부연대장에 송요찬(宋堯讚)소령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본군 준위 출신이다.

당시 50대 중반인 로버츠는 미육사 출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으며 용맹을 떨쳤는데 전쟁이 끝나자 진급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한국 주둔을 자원하였다. 통위부 고문관 시절 제주도 주둔군이 9연대에서 11연대로 교체될 때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송요찬을 선정해 제주에 파견한 장본인이다. 이 때 로버츠는 후에 강경진압작전을 벌인 송요찬에 대해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제주주둔 미군사령관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에게 소개한 바 있다. 또 송요찬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최상의 장교이며 우리는 그를 감찰관’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도 했다.

경비대총사령부는 7월 15일자로 경비대 제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연대장에 기존 11연대 부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을, 부연대장에는 11연대 대대장인 서종철(徐鐘喆) 대위를 각각 임명했다. 당시 제9연대 고문관이었던 피쉬그룬드(Harold S. Fischgrund)는 송요찬에 대해 ‘매우 터프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제주도 작전에 관한 모든 상황을 제주도에 파견한 고문관으로부터 보고 받고, 이를 다시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CIA, 송요찬 9연대장, 서북청년회를 강경진압작전의 핵심으로 적극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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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부터 박진경 11연대장, 김종면 중령, 로버츠 준장, 최갑종 소령, 백선진 소령, 임부택 대위(1948. 5.).

미군의 요청으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했다. 그리고 6일 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포고문’을 발표했다.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1948년 10월 17일, 포고문

특히 로버츠 고문단장은 1948년 11월 8일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CIA는 훌륭히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9연대장 송요찬 중령은 강력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1월 15일자 보고서에서도 “CIA의 활동이 우수하다”고 칭찬하면서 “한국군 3개 대대를 주로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로버츠는 또한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등에게 보낸 12월 18일자 서신에서도 강경작전을 펼치고 있는 송요찬에 대해 “송요찬 중령은 섬 주민들의 당초의 적대적인 태도를 우호적‧협조적인 태도로 바꾸는 데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하였다”고 거듭 칭찬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신문과 방송 그리고 대통령의 성명에 의하여 크게 일반에 알려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계엄령 시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제주4·3사건의 전개과정에서 계엄령은 주민 희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전의 희생이 비교적 젊은 남자로 한정된 반면,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서너 살 난 어린이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계엄령은 제주도민들에게 재판절차도 없이 수많은 인명이 즉결 처형된 근거로 인식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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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경 연대장 고별식에서 딘 군정장관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1948.6.18.).

로버츠 고문단장은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도에서 죽어갔다. 그들의 대부분은 게릴라의 공격으로 살해당했으며, 약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고문관 리드(John P. Reed) 대위의 보고내용을 첨부해 1949년 2월 7일 미 육군부장관 로얄(Kenneth C. Royall)에게 보고해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그는 또 미국 본토의 군 수뇌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기정사실로 여겨 철수를 서두를 때도, “미군이 사라진다면 즉시 북한이 남한을 흡수 또는 공격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며 철수에 반대하기도 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29일에 미군사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했다.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제24군단 사령관/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전략) 13. 제주도로부터 들어 온 추가보고는 특히 반란군들에 대한 군대의 견실한 활동과 공격을 대비하는 체계와  군‧경의 우수한 협력에 대한 언급이 있다. CIA는 훌륭히 업무를 수행. 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은 강력하고 적극적임. 활동상황은 다음과 같음.  10월 28일: 50명의 게릴라 공격을 격퇴했음. 경찰 4명 사망, 5명  부상. 최소한 3명의 게릴라 사망. 여러 돌 장애물 도로에 설치. 제9연대장은 17명의 부하들을 공산주의자 세포혐의로 체포. 10월 29일: 군대와 게릴라간의 전투, 약 100명에서 135명 가량의 게릴라 사망(중략) 18. 10월 29일에 사살된 게릴라 지도자 이덕구의 신원이 확인됨. 사망 당시 게릴라들 중 가장 고위 지도자라고 일컬어짐. (후략)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 L. Roberts) 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 Weekly Activities) 1948년 11월 8일

‘계엄법 문서 송부/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국방부 총참모장/‘계엄법’에 관한 문서를 동봉한다. 귀하는 이 문서를 귀하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발표하여 그들이 계엄법이 무엇인지, 언제 발표될 수 있는지, 누가 발표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영향을 무엇인지를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W.L.Roberts)준장’-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공한(公翰) 1948년 12월 1일

‘추가보고에 따르면 2월 20일 도두리에서 폭도 76명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피살자 중에는 여성 5명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아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과 군기대(한국군 헌병)가 이 처형식을 감독했다. (한국군 보고) 논평 : 미군사고문단원 4명이 우연히 폭도 38명의 처형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38명은 처형되어 있었다. 이전 보고들에 따르면 폭도들은 총살 집행부대 앞에서 군인이나 경찰에 의하여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민보단에 의해 행해진 대량학살에 대한 최초의 보고이다.’-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9년 3월 2일~1949년 3월 3일 (No. 1077, 1949. 3. 3.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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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수 순천 10.19사건은 남한 단독선거가 실시된 후에 발생한 사건이 아닌가요?


    1) 여수 순천 10.19사건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여수 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줄여서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 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어,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제주도 4.3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를 반대할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입니다.


제주도 4.3사건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5월 10일에 있게 될 총선거(5.10 총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폭동입니다. 5.10 총선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하여 남한에서 5.10 총선거를 실시 하였는데 이 선거는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였습니다. 이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헌 국회는 민주 공화국 체제 헌법을 제정했으며 1948년 8월 15일 비로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입니다.


2) 그러면 그 당시에 어떻게 남로당이 군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다양한 방법으로 입대 시 신원조회를 하는 지금과 달리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재를 가하지 않고,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남로당에서 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군내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했습니다


여수·순천 10·19사건

 

붉은 한 품고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

‘여수·순천 10·19사건’


이유도 모른 채 죽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 거냐고 묻지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웃이, 가족이 죽는 것을 눈물 삭이며 바라봐야만 하는 시절이 있었다. 얕은 구덩이 속으로 탑처럼 쌓인 시신을 던지듯 묻어야만 하는 시절이 있었다.

 

불과 60년 전 어제, 이곳 순천과 여수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금 우리가 땅 딛고 사는 이곳에서 버젓이 일어났던 일이다.

알고 있는가? 우리가 무심히 ‘여순사건’이라 부르는 일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

 

# 4월 3일 제주의 비극, 여순사건의 시작
여수·순천 10·19사건은 제주 4·3 사건의 시작으로 그 비극이 이어졌다. 45년 광복을 맞았지만 그간 나라가 둘로 나뉘는 등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뉜 세력들의 갈등은 여전했고 민생마저 불안했다.


제주도의 좌익 세력은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반미 등의 구호를 외치며 들고 일어났고 같은 해 8월 출범한 제 1공화국,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를 잠재우고자 여수 14연대 1개 대대의 제주 파병을 명한다. 그들의 임무는 제주 양민을 사살하는 것.


그러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는 좌익 계열의 간부와 사병이 다수 소속돼 있었고, 때문에 이들은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동족상잔 제주도 출동 반대, 친일 집단 경찰 타도’를 외치며 여수로 들어왔다. 당시 14연대 부대원은 모두 2700명, 제주도 출동 반대와 남북 통일 명분에 찬성하고 반란에 동조한 병사는 2500명이었다.


여수로 돌아온 이들은 즉시 여수의 관공서를 점령하고 극우 인사들을 즉결 처분했다. 다음날인 20일 오전에는 순천행 통근열차를 이용, 순천을 점령했다.

 
또한 남로당원, 노조원 등은 14연대에 적극 가담하며 해방 후의 자치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다시 세우고, 보안서를 조직해 악질 경찰을 체포하고, 친일파 모리배의 은행 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식량 영단 창고를 개방하여 쌀과 물자를 시민들에게 배급했다. 이로 인해 여순사건은 더 커져만 갔다.

 

# 정부 진압군 투입, 민간인 학살
정부는 여수·순천을 막기 위해 정부는 3·8선을 방어하는 8개 연대를 제외한 7개 연대를 여수로 보낸다. 장갑차 등 막강한 무기를 앞세운 진압군은 22일 순천을 탈환했고, 3차례의 탈환 작전을 펼쳐 27일 여수에 입성,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사진설명 : 무참한 죽음에 그저 울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14연대와 이들에 동조한 이들의 일부가 사살, 체포되기도 했지만 주력 부대는 지리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진압군은 반란군을 척결하겠다는 본래의 취지를 잊고,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진압군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맨 처음 한 일은 시민을 학교 운동장에 모은 뒤, 민가를 샅샅이 수색하고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거나 의심나면 사살하는 것이었다.

진압군은 먼저 사건 가담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이 붙잡히면 학교 건물 뒤편 등에 마련된 즉결 처분장에서 개머리판, 몽둥이 등으로 죽이거나 곧바로 총살했다.

 

부역자를 지목하는 일은 반란에서 살아남은 그 지역의 경찰, 우익인사, 우익단체 청년들이 맡았다. 이들이 가리킨 단 한번의 손가락질이 생사를 갈랐다. 색출 작업은 이처럼 누가, 어떻게 참여했는지에 대한 객관적 심사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반란군과 한 패’로 몰리는 일은 참 쉬웠다. 군인들 앞에서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진압의 대상’이었다. 이로 인한 여수의 사망자는 1300명, 행방불명은 3500명. 순천은 사망 1135명, 행방불명 818명이다.


[사진설명 : 죽은 이의 시신을 확인하는 일은 고역이다]
대부분 좌익과 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저 자식새끼들과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양민들이었다.  

 

이제 그때 그 일을 겪은 이도, 또 기억하는 이도 하나둘 사라지고 없다. 사람이 까닭 없이 죽어가던 그 곳에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쌓이고 숨결이 덮인다.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가. 조용히 묻어야 할 일이 되고 마는가.

 

[사진설명 : 총을 겨눈 이들과 겨눔을 당하는 이들]

<이 길에 옛 일들 서려 있는 것을 보고 / 이 길에 옛 사람들 발자국 남아 있는 것을 본다 /
내가 가는 이 발자국도 그 위에 포개지는 것을 본다 / 하물며 이 길이 앞으로도 늘 새로운 사연들 / 늘 푸른 새로운 사람들 / 그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결심하고 / 마침내 큰 역사 만들어갈 것을 내 알고 있음에랴!> -이성부 ‘지리산’ 중-


알 것이다. 마침내 더 큰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글·사진 : 순천광양 교차로 최명희 기자 cmh@sgsee.com /자료 사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